조진섭
조진섭(1984, 서울)은 프랑스 파리 사진학교 ‘이카르 포토’(Icart Photo)를 졸업했고 프리랜서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세계 각지의 난민을 통해 불균형의 현대 사회를 이야기하며 사진의 확장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Grand Prix Paris Match(2015, 2016), 대구 사진 비엔날레(2016), 서울 사진 페스티벌(2016), 디아스포라 영화제 특별전(2018), DIPE(Dali International Photography Exhibition, 2019), 한미사진미술관_Portfolio, View Review(2020), SKOPF 올해의 작가 3인(2022) 등에 전시 및 선정되었다.
그는 터키 남부 시리아 국경지역의 시리아 난민, 프랑스 칼레의 아프리카 난민, 발칸반도의 아랍 난민, 독일 정착 시리아 난민, 미얀마와 방글라데시 로힝야 등을 취재했으며, 2019년부터 한국 동두천에 정착한 라이베리아 난민의 이야기를 작업하고 있다.
부산 국제사진제 포트폴리오 선정작품
G의 나라’ 작업 노트는 G가 직접 쓴 것이며 수동적으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던 과거를 벗어나 더욱 능동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그녀의 의지가 반영되었습니다.
그리고 굴곡진 G와 G의 가족들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한국 사회가 가진 편견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2012년 엄마와 함께 한국에 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행기라는 것도 타보고 모든 것이 마냥 신기했다. 엄마와 함께 한국에 도착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공항 앞에서 서성였다. 그 때, 천사 같은 분이 우리에게 동두천이라는 곳을 알려주시며 거기에는 외국인이 많아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모든 한국 사람들이 이렇게 착하게 도와주는 사람들인 줄 알았다.
그해 9월 4학년 2학기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어린 나이에 나는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와 내 피부색때문에 늘 혼자였던 나는 “원숭이 깜둥이”이라며 괴롭힘을 받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한테 다시 가나로 가고 싶다며 엉엉 울곤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한국어를 8~9개월 만에 완벽해진 내게 친구가 생겼지만, 나를 피하는 애들 또한 많았다.
2015년 어느새 중학교에 들어간 나는 이제 한국어도 완벽하고 모든 게 괜찮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학교에는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퍼졌고 모르는 선배들한테도 욕을 들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친구들과 점심 먹고 반에 왔는데 내 책상에 “깜둥이, 왜 사냐, 죽어, 너희 나라로 도망가,ㅅ발,ㅆ년” 이라고 쓰여진 낙서가 있었다.
엄마와 새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남동생과 지하철을 탔을 때 유독 남동생은 사람들에게 이쁨을 받았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예쁘면 뭐해. 만지지 마세요. 그쪽도 쟤네처럼 까맣게 변해요.”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럴때면 진짜 숨고 싶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항상 힘들 때 나의 버팀목이 되어주며 위로해주시는 엄마가 있어 버텨왔다. 시간이 지나면 편해진다는 말이 맞는지 어느새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뒤에서 하는 말들이 아직도 신경 쓰이지만, 예전처럼 두렵고, 숨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 곳에서 초, 중, 고를 졸업하고 대학을 다니며 “한국인인 줄 알았다. 이 정도 말하면 이제 그냥 한국인이지”라는 말을 듣지만 나는 1년에 한번씩 외국인 등록증을 연장을 해야 하며, 그마저도 기한이 만료된 여권때문에 언제 거부될지 모른다. 인도적 체류비자로 더 나은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부모님을 보면 우리 가족을 보호해줄 나라는 없을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태어난 내 동생의 꿈은 군인이다. 그러나 동생이 지켜야 할 나라는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G”는 그녀의 가운데 이름인 Gracious의 약자이다.
Jin seop Jo
Busan International Photography Festival Portfolio Selection
The artist statement “The country of G” written by G herself is reflected of her will to live in a positive way, rather than to be shrunk back in horror and act passively like her past.
Moreover, the story of G and G’s family tells a tough life here and shows Korea fallen into a particular prejudice.
Arrived at Korea with mom in 2012.
I was so thrilled at taking plane which was the first time in my life. My mom and I were hanging around airport, as we didn’t know where to go. The kind Korean lady with a benevolent smile told us ‘Dongdocheon’ where bunch of foreigners live, and we might get help there.
I believed all Koreans are generous and nice enough to help strangers by then.
Started school life in September 2012, as a fourth grader student.
It was first time that I want to kill myself at that time. Due to poor Korean and my skin color, I was all alone and bullied calling ‘Black Monkey’. Every time classmates called me ‘Black Monkey’, I clung to mom, desperate and crying, and said “I want to go back home, Ghana!” After 9 months, My Korean became perfect like a native speaker and thankfully had a few friends, but lots of people still avoided me.
Went to middle school in 2015, and I expected the normal school life as my language and thoughts are not different from Koreans.
But my expectation was just dream, not reality. The nasty rumor about me was all around school, and some senior students even swore foully. One day, I had lunch and came back to class, and found the scribbling on the desk with full of nasty words like ‘Why do you live nigger?’, ‘Kill yourself, nigger’ and ‘Go back to your country Fucking bitch’ so on.
My little brother born by mom and stepfather used to be loved by people in the Underground. Whenever people adored my little brother, there were some people who said “Don’t touch him. He will become black more and more as he grows up” Every time the Koreans spit out curses at my brother, I wanted to hide and even kill myself.
However, I endured the all crisis due to mom who gives me comfort and make me lean on her.
As time goes by, I’ve changed my mind. I don’t want to hide or kill myself anymore, although the curse and swearing are still on my mind. I believed that I am a Korean because I finished elementary, middle, and high school here. Some people say “You got education in Korean way for 8 years. That means you are a Korean”. But the real life is not that simple.
I have to extend certificate of alien registration once a year and the risk of refusal always exists because of the ‘expired term’ passport. I sometimes think that any country is not able to protect our family, when my parents cannot have a better job without a humane residence visa. My little brother born in Korea wants to be a soldier in the future.
However, I wonder where the country is that my brother can protect.
“G” stands for her name, “Gracious”.
조진섭_G의나라_01
조진섭_G의나라_02
강철행
E-MAIL : lala1504@naver.com
전화번호 : 010-3822-0132
주 소 : 경북 포항시 남구 중앙로 158번길 5 1층 사진공방
사진경력 (개인전)
2021. Steel Sity 개인전(11월) / 포항 중앙아트홀
2016. 멜랑콜리 영일대 개인전 / 포항 중앙아트홀
2014. 기이한 만남 개인전 / 프랑스문화원 아트스페이스
사진경력 (단체전)
2020. 진주사진 터 / 원스탑우드
2018. 부산국제사진제 / 부산문화회관
2013. 송도에 부는 바람전 / 포항문화예술회관
2012. 울산국제사진페스티벌 / 울산문화예술회관
2011. 포토부산사진전 / 해운대문화회관
2010. 포항산책 기획전 / 경북학생문화회관
2010. 포항아트페스티벌 / 포항문화예술회관
2010. 포항사진2010 / 포항시립미술관
2010. 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
사진수상
2015. 최민식 사진상 특별상부문 대상
멜랑콜리 영일대
영일대 해수욕장은 포항의 대표적인 해수욕장이다.
영일만에 접해 있으며 도심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어 가족 단위로 많이 찾는 곳이다.
한때는 바닷물이 오염되어 찾지 않던 곳이 이제는 많은 피서객들이 찾는 포항의 대표적인 피서지가 되었다.
지친 일상을 떠나 찾은 피서지에서의 관광객들은 흥겹고 즐거운 모습들이다.
인파로 북적이는 화려한 공간에도 고독한 사람이 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이 하지 못 하는 외로움이 있다.
어느 시인이 노래했던가 그대가 옆에 있어도 나는 항상 그대가 그립더라...
함께 있으면서도 혼자다. 가득하지만 텅 비어 있다.
16-150614-2-005-1-11
17-160812-3-002-1-11
김일목
김일목은 1994년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농사를 지었다. 자급자족과 농업이 인류사에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했다. 17살 때 전국 각지에 있는 토종 씨앗을 채집하고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을 했다.
특히 삶의 터전이자 땅을 경외의 시선으로 새롭게 바라보게 되면서 사진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단지 기록으로서만이 아닌 존재적 가치를 드러내는 사진의 역할에 눈을 뜨게 되면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의 삶을 진지하게 추구하게 되었다.
각양각색의 현장에서 진지하게 작업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과 사진가는 그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듯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그의 사진은 첫 작업으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나를 품은 살갗’을 발표할 수 있었다.
(2020년 온빛다큐멘터리 온빛신진사진가상/ 2021년 ‘나를 품은 살갗’ 사진위주 류가헌)
어릴 때 농업에 관한 관심은 농업생산이었다면 요즘 그 관심사는 농업을 하는 사람, 노동자, 그들의 삶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으로 옮겨 왔다.
외로운 땅
2017년 두 명의 캄보디아 사람들은 비전문취업비자(E-9)를 받고 한국으로 왔다.
그들은 한국으로 오기 위해 2011년부터 기초한국어시험을 준비했고, 여러 번의 시험을 본 끝에 2017년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취업을 하게 된 곳은 담배와 애호박, 땅콩 등을 생산하는 농장이었다.
5년 가까이를 이곳 농장에서 일했다. 그렇게 열심히 벌어 모은 돈으로 캄보디아에 땅도 샀다. 농한기가 되면 한 달, 두 달씩 고국에 다녀오는 데 갈 때면 한국 과일이며 믹스커피, 화장품, 옷 등을 사서 갔다.
해가 바뀔수록 농촌에 젊은 사람들이 줄어든다고 하는 얘기는 이미 오래전, 아주 오래전 얘기다. 그 빈 자리는 이주노동자들이 채웠고 이제는 그들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고 한다. 그렇게 농촌인력 빈자리를 채운 이주노동자 중에 누군가는 고국에 땅을 사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불법 체류자로 남아 뉴스에서 심심치 않게 보도되기도 한다.
그들은 우리 사회 안에 분명 존재하지만 가끔은 그들의 존재를 부정당하기도 한다. 실체 없는 “우리” 안에 그들은 들어올 수 없으며 한여름 뙤약볕 아래 그들의 땀방울은 찬란하지만, 그들을 향한 신선은 한겨울보다 차갑기만 하다. 너무나도 명확한 차별의 시선은 그들을 지치게 한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한국은 외로운 땅이야.”
김일목_외로운땅_02
김일목_외로운땅_04
양병만
yangman.co.kr
어린시절 그림을동경하던 꿈을 품고있다가 50이되어서야 사진을시작했다.
여행과거리를 다니며 사람들의삶과교감하던그는 무의식의지점에서 자신을만나 자유로워졌다.
22년째 조인스HR을운영중이다.
쿠반(Cuban)이 그리는 무늬
1. 어릴 적부터 나는 혼자였다. 자연스럽게 혼자 생각하고 혼자였던 기억들이 많다.
2. 누구나 이듯 한참동안 이나 주어진 현실 속에서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만들어 가려고 애를 썼다. 똑같은 곳을 보고, 비슷한 길을 걸어갔다. 조금 다른 옷 들을 입고 살아가고 싶었다.
3. 어느 때부터인가 다시 혼자 서 있기를 시작했다. 나를 마주하면서. 내가 선택한 벌판에 다시 섰다. 나의 자유의지로 내 가슴이 뛰는 곳을 찾아야 했다.
이리저리 내달리며 길을 찾아갔다. 혼돈의 상처들을 희망과 기대로 가슴에 새겼다.
4. 그 내달림의 어느 자락 카메라와 사각의 창을 만났다. 그 창 안에 사람을 그렸다. 내 모습이었고 시작된 울림이었다.
그 초라한 나의 모습은 애절했고 충만했다.
5. 나의 울림은 간결하고 원시적일 때 강렬했다. 그것은 무의식에서 거울처럼 선명했다.
잿빛 그 깊은 암묵 속에서 샘솟듯이 살아 움직이고 자유로웠다.
울림과 되울림으로 전해지는.. 그 무늬는 나의 가슴과 머리를 휘몰아 온몸을 지배했다.
나와 그들의 무의식 그 뜨거운 공감이었다.
6. 무의식의 정지된 지점 그것이 그리는 무늬는 자연이고 영혼의 꽃이 된다.
우리는 누구나 그 순간순간들로 예술이 된다.
양병만-1
양병만-2
원종일
E-MAIL : E-mail rashomong@naver.com
전화번호 : 010-3256-8499
작가 원종일은 학부 때 영화를 전공했으나, 러시아국립영화학교 촬영감독 출신의 교수에게서 사진의 기초를 배우게 되었다. 한 장의 사진이 사실을 뛰어넘는 사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강렬한 깨달음 후에
좀 더 사회적 현실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좀 더 정제되고 함축된 언어로 세계관을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에 늦게나마 일본에서 사진을 공부하게 되었다.
오사카예술대학원 예술연구과 사진전공으로 입학 후 티베트를 기록한 사진으로 제 62회 니콘 니코르 포트 콘테스트 컬러사진 부문 준특선을 수상하였고, 이를 니콘살롱 신주쿠와 오사카에서 전시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지만 무관심했던 동시대의 문제- 국내 이슬람 문화, 환경, 젠더-에 대해 4X5대형카메라를 활용해 작업하고 있다
학력사항
2013. 04 – 2015. 03 오사카예술대학원 예술연구과 예술제작전공 디자인영역 사진
1999. 03 – 2004. 02 서울예술대학 영화과
수상내역
2014 제 62회 니콘 니코르 포토콘테스트 준특선 수상
사진전시
2015 오사카 예술대학 대학원 졸업작품전 / Abenoharukas sky campus
2015 제 62회 니콘 니코르 포토콘테스트 입상작품전 / Nikon Salon Shinjuku, Nikon Salon Osaka
마샤알라
우리가 미쳐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낯설고 살갗만 닿아도 놀라는 사실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 중 나는 어느덧 우리에게 성큼 다가와 있는 이슬람 문화와 무슬림에 대해 주목했다. 서양적 시선을 무의식적으로 배운 아시안인 나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교과서를 읽고 배우며 성장했다. 그리고 백인 종군사진기자들의 사진을 통해서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어린이와 여성을 억압하는 그들을 보며 자랐다.
아, 흰색이 검정보다 위대하고, 하나님이 알라보다 인자하구나..
그러나 보는 행위가 어떤 보이지 않는 것에 억압받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안 이후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의심해야겠다고 각오했다. 그리고 그 첫째 작업으로 국내 무슬림과 그들의 일상을 가감없이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애초 취재는 디지털카메라로 명료하고 확고한 프레임을 만들어 작업했다. 시선을 사로잡는 구도와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 사진들을 모아놓았을 때 나는 깨달았다. 나 또한 그들을 어떤 틀에 맞춰서 목적에 맞게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술이 사실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낯설고 불편할 필요가 있었다. 대형필름으로 작업하며 매력적인 프레임을 만들 수는 없지만, 그렇게 보다 많은 설득과 대화 그리고 이해를 구하며 작업하고 있다. 오롯이 사람이 보이고 그 사람들이 낯선 한국 땅에서 어떻게 우리와 공존하고 있는지 기록하고 싶다.
원종일_마샤알라_01
원종일_마샤알라_02
유혜숙
전주출생
전주포토페스티벌 운영위원
전주국제사진제 초대전시 2020,2019
사진연구소 AP-9 연구원
개인전 Maitreya(미륵) 2019
그룹전 땅의 이데야 2022. 외 다수
순교
순교(Martyr)는 하늘로부터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입었다는 확신이 들 때 가능한 일이다.
‘우리의 삶이 영원하다’는 확신이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섭리가 없다면 갈 수 없는 길이리라.
내 고향 전주는 순교의 땅이다. 2021.03.11~13에 나는 초남이 성지 바우배기에 있었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들의 무덤 주변을 돌아보며 그들의 삶과 닮아 있는 남겨진 대지를 먹먹하게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을 때는 치명자산 순교자 묘지를 찾아갔다.
이 몇 장의 사진들을 시작으로 나는 순교의 이미지들을 찍어 나아갈 것이다.
L1006444
L1006530
장영진
Artist / Photographer
전화번호: 010-4345-5622
e-Mail: yjjang515@hanmail.net
https://www.facebook.com/yjjang5150
비움갤러리와 더빔갤러리에서 <사물과의 대화>(2021), 인사동아지트갤러리에서 <도시여자의 기억상자>(2020), 인사동베를린갤러리에서 <돌의 기억>(2019)을 비롯한 다수의 개인전과 크로아티아 자그레브포토갤러리에서 (2022), 코리아아트페어(2021), 이룸갤러리에서 <그곳에 무슨 일이?>(2021), 류가헌갤러리에서 <온빛 아카이브 통영_온빛, 섬빛에 물들다>(2020), 러시아 우파갤러리에서 <러시아우파사진협회 초대사진전>(2019), 수원행궁동갤러리에서 <수원국제사진축제 사진전>(2018), 인사동미술세계에서 (2018)등 다수의 단체전을 가졌다.
2013년 사라지는 구도심을 기록하는 작업을 시작으로 도시와 사람, 사물의 기억과 정체성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대학에서는 문학을 대학원에서는 상담심리학을 전공한 사진가이며 테라피스트로서 사진스토리텔링, 마을사진기록단, 사진심리치유등의 강의와 특강들을 했다.
도시여자의 기억상자
그녀는 기억상자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슬프고 시린 기억과 기쁘고 설레는 기억들이 함께 존재했다. 그것들을 꺼내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다.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꼭꼭 덮어 둔 이야기도 기억상자에 있었다. 분명한 것은 덮어 둘 때 보다 꺼내어 그 감정과 대면할 때 그녀는 도시여자로 더 당당히 설 수 있었다.힘든 기억일수록 관심과 환기가 필요하다. 도미니크 라카프라(Dominick LaCapra)는 문제의 과거를 정면통과(working through)하는 것이 자신에게 가로막혀 있는 곳을 가로질러야 하는 자기-앎의 과정이며, 기억의 '재연'을 통한 생생한 경험이 그것을 뚫고 나갈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한다고 했다.
사진가이자 북테라피스트로서의 직업적 정체감, 가정일과 사회적 책무 사이의 균형잡 기는 늘 삶의 화두였고, 코로나19로 텅빈 도시를 촬영하면서 그곳에 타인 대신 나 자신을 세웠다. 갑작스런 폭설에 교통사고로 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학장시절 그 현장의 고목앞에 다시 서는 용기, 주부와 사회인의 역활속에서 28시간을 살아야 했던 시간들을 명동 거리에서 담았던 기억, 코로나로 인해 답답한 상황과 심정을 비닐속에서 재연하는 작업들까지 나의 기억상자에 고스란이 담겼다.
사진을 시작하면서 줄곧 도시와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과 사물의 이야기와 기억을 사진으로 작업했다. 이번 도시여자의 이야기와 기억을 셀프 포트레이트 (self-portrait)로 담으면서 기억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는다. 기억은 파편적이고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 모든 기억은 망각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저장된다. 삶에 의미 있는 기억들을 회상하고 반추하면서 사진으로 표현하는 일은 자신과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작업이자 현대 도시를 살아가는 우리 안에 내재된 이야기와 대면하는 일이다. 누구나 겪었고, 겪고 있을지도 모르는 평범하지만 소중한 기억들을 사진으로 정지시키고 환기함으로써 그 대리적 환기가 우리 안의 어두운 기억에 불을 밝히고, 신선한 공기를 불어 넣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기쁘고 설레는 기억이든 슬프고 고통스런 기억이든 모든 기억은 소중하다. 지금의 그녀를 있게 한 모든 것들이므로...
#1_ Moment of despair_장영진
#2_Forest of Memories_장영진
김선미
1949년 3월 16일 전남 광주에서 출생하고, 1967년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 독어독문학과를 입학하고 1971년에 졸업. 문학사 취득 후 2013년 경상국립대자유전공학부에서 사진영상트랙에 입학해 2015년도에 졸업하고 미술학사를 취득했다.
사진전시 (개인전)
2020 별의 정원 개관전 초대 개인전 "텃밭" 별의 정원 전시관
2018 수상작가 초대 개인전 Commune with old time 온갤러리
2017 The weight of time 인사동 리수갤러리
2017 중국 대리사진축제
2011-2017 경남 국제사진페스티벌
사진전시 (단체전)
2017-2021 사진진주 참여
2017 "거기 있어줄래요?" 순천 창작 예술촌 2인전
2017 중국 대리사진축제 참여
2011-2017 경남 국제사진페스티벌 참여
외 다수 전시 참여
수상내역
2017 사진진주 작가상
2017 "가족사랑, 가족행복" 사진콘테스트 해모로대상
존재의 가치를 읽어줌
나이가 드니까 참 좋다.
사위가 어둠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역할을 하고야 마는 숨어 피는 꽃과숨어있는 것도 숨어 있는 대로 존재의 가치를 읽어 줄줄 알게 되고
소박한 것에도 그 내면을 보고 위로할 줄 알 게 되니 이것이 종심(從心)의 세월을 산 덕분인가 싶다.
이제 모시고 살 부모님도 돌봐야 할 자식도 없는 여유롭고 한가한 시간을 맞이하며
지금 현재 처한 우주공간에 만족하며 삶을 소금처럼 녹이고 있다.
평범한 일상에서 마음과 눈이 이끄는 대로 자유롭고 여유롭게 내 마음을 담아보고 싶었다.
죽을 때까지 성장이라는 믿음으로 호흡하고 있다.
어두운 곳에 은근히 스치는 빛으로 평범한 일상을 비범하게 만드는 현상에 이끌리어 셔터를 눌러 빛 그림을 그려본다.
DSCF2333
DSCF2371
이창희
전화번호 : 010-8976-5949
E-MAIL : 63chlee@hanmail.net
사진은 20대부터 똑딱 똑딱 찍는 것을 시작하여
이후 사진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며 찍은 기간은 10여년이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 직장을 다니면서 틈틈이 사진 작업 활동을 하였고, 올해 6월에 정년퇴직을 하고 본격적 사진 활동을 하고 있다.
활동기간 동안 서울에서 개인전 2회, 사진집 <풍금소리> 발간하였고 러시아와 서울, 진주, 사천 등의 단체전 20여회를 하였다.
공간
부모님 시대의 시간적 공간적 삶의 터전에서 풍요롭지 못한 물질적 갈증은 풍요로운 온정으로 해소했음을 우리는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마음은 풍요롭지만 물질적인 것이 비어 있는 과거 물질적인 것이 풍요롭지만 마음이 비어 있는 현재 미미하지만 과거와 현재에 내재된 심미적 존재 가치에 대한 고리로 세대 간 연결해 보려고 하는 나의 의도이다.
에너지 넘치게 초고속 발전하는 시대에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부분을 접목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할 수 있겠지만 내 가슴에 있는 무언의 무게를 사진 작업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나는 가난한 집에서 자라고 유년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나의 부모님들 세대에 삶의 생존 터전이 어떠했는지를 보고 들어서 알고 있다.
내가 부모님 나이가 되고 자녀들이 성인이 되면서 피할 수 없는 공간이 부모와 자녀의 가슴 안에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 적응하는 맞춤형 삶의 현장이라 하겠지만 물질적 풍요로움에 기계처럼 움직이며 메말라가는 정(精), 이해하면서 잠시 과거와 현재의 공감대를 형성 하고자 하는 작은 욕망 일 것이다.
잃어버린 것과 잊어버린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이창희_1
이창희_2
정윤순
학력사항
중앙대학교 CPP 3년 수료
사진전시 (개인전)
2021 대전 갤러리 더 빔 초대전
2020 서울 금보성아트센터 제 1회 FNK순수부문 수상자전 "Me, Escape"
사진전시 (단체전)
2021 제 19회 동강국제사진제 참여
2019 서울 인사동 라메르갤러리 "세번째 호흡"
2018 서울 인사동 라메르갤러리
2018 서울 마포중앙도서관 갤러리 "다시보다"
2018 서울 충무로 갤러리꽃피다 "반하다"
2018 서울 마포중앙도서관 갤러리 "마주하다"
2017 서울 인사동 라메르갤러리
2017 서울 인사동 명작갤러리 "REBOOT"
Me, 항해
2015년 고속도로 43중 교통사고로 말미암은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우울증 세계에서 극복 해 나가는 작업이다. 병원에서 오랜 생활의 불안함과 혼돈, 삶의 의미가 상실되어 잃어버렸던 망망대해에서 나의 자아를 찾고 싶었다. 세상으로 향하는 인생의 세찬 비바람을 오직 나의 노력인 패들링(Paddling)으로만 헤쳐 나가며 도전을 하고 싶었고 그 의지의 매개체인 카누(Canoe) 제작에 직접 참여하여 만들었다.
나만의 방주인 카누(Canoe)를 타고 마음의 어두운 터널을 지날 것이고, 어찌할 바 모르는 계곡을 헤쳐 나갈 것이며, 산 위에 올라 나를 다스릴 것이다. 죽음의 절망에서 희망의 다리를 지나 순탄대로의 항해를 해 나가고 싶은 나의 강력한 의지이자 몸짓의 사진적 표현이다.
정윤순_1
정윤순_2
최흥태
전화번호 : 010-8166-1953
E-MAIL : artph1@daum.net
최흥태는 '디아스포라', '블루로드'와 '보이는게 다다' 등 사회적 관점에서 오랜 시간동안 작업을 해왔다.
최근 풍경에 대한 사회적 관점에서 비켜나 풍경과의 관계성을 가지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겨울이 깊다' 작품들이 그 시작점이었다. 풍경의 세부 모습들을 모아 '위로하는 슬픔' 전시를 가졌다.
용호동 용호농장
세잔느의 사과에 대한 오마주, 한 장의 사진미학에 거슬러 보려는 거친 의욕이 있었습니다. 사진 작업의 형식과 내용을 고민했던 시기와 맞물려 박혜영 교수의 ‘집 지키는 일이 가장 급진적 저항인 시대’ 글은, 초곡리에서 용호동 용호농장으로 이어지는 디아스포라 사진 작업의 당위성과 구체성을 높여주었습니다.
모든 존재에게는 지친 삶의 여정에서 몸을 기댈 자기만의 오랜 언덕이 있다고 했으며, 평생 서 있는 나무 에게도 친근한 바람과 낯선 바람이, 계절을 오가는 새들에게도 정든 뭍과 낯선 뭍이 있을 것이라 말합니다. 누구나 공감하듯이 나무건 사람이건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누구나 자기 생을 기댈 친숙한 세계가 필요하며, 그래서 정든 터전을 떠나게 되면 그리움으로 몸살을 앓게 되는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용호동 용호농장은 가장 낮은 사람들의 친숙한 터전이, 낡고 오래된 것에 대한 병적인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의 심중과 재개발로 생기는 불로소득의 욕망이 투영됩니다.
도시개발이란 이름 아래 철거 문명이 만들어놓은 풍경입니다.
2003-2007년 여행자처럼 이곳을 왔기에 미처 담아내지 못한 풍경을 아쉬어 할 뿐입니다.
20030215-02-1
20050514-22_24